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야시 곤스케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에도 시대]] 말기 [[아이즈 번]][* 오늘날 [[후쿠시마현]]의 서쪽 일대]에서 안세이(安政) 7년(1860) 음력 3월 2일(양력 3월 23일) 출생하였다. 그가 9살이던 메이지 원년(1868)에 [[보신 전쟁|도바 후시미 전투]]로 할아버지 야스사다(安定)[* 2013년 [[NHK]] 드라마 〈[[야에의 벚꽃]]〉에도 등장한다.]와 아버지 마타이치로(又一郎)를 잃었기 때문에 [[아이]]의 몸으로 하야시(林) 집안의 가독(家督)[* [[일본어]]로 가토쿠(かとく). 집 안에서 가장으로서 가지는 권한을 의미한다. 가독을 상속한다는 것은 그 집안의 가장 또는 가주가 되었다는 뜻이다. 현대 [[일본]]에서는 법적으로 가독이 폐지되었지만 아직 개념으로는 남아 있다.]을 상속받았다. 할아버지의 정식 [[이름]]은 '야스사다'지만 일반적으로는 '곤스케(権助)'라고 불렸는데 그는 할아버지의 통칭까지 물려받아 이후로 '하야시 곤스케'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. 어린 몸이지만 가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계속 [[무진전쟁]]에 참가하여 아이즈의 영주와 함께 메이지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. [[전쟁]]이 끝난 뒤 하야시 [[가문]]은 멀리 도나미번(斗南藩)[* 오늘날 [[아오모리현]] [[무츠시]](むつ市) 일대]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아 [[고향]]을 떠났다. 그리하여 온 [[가족]]이 쌀 3홉을 배급받아 살기가 힘들어서 어머니는 지인을 믿고 다시 아이즈 번으로 돌아가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생활했다. 이 때 할아버지의 친구인 [[육군]] 소좌 고다마 사네후미(児玉実文)가 옛 [[친구]]의 유족들이 이렇게 사는 사실을 알고 곤스케를 데려가 키워주었다. 고다마가 곤스케를 데리고 [[가고시마]]로 가던 중인 1877년 [[세이난 전쟁]]이 일어났는데 고다마가 [[군인]]인 덕에 곤스케 또한 전쟁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.[* 후일 고다마가 아직 어린 자식을 남기고 숨을 거두자 이번에는 곤스케가 고다마의 어린 자식을 데려다 양육함으로써 보은하였다고 한다.] 곤스케는 1878년 [[오사카]]전문학교(現 [[긴키대학]])에 들어갔다가 [[도쿄대학]][*A] [[정치학과]]로 진학하여 1883년 [[졸업]]하였는데 도쿄대학 [[총장]] 와타나베 고키(渡辺洪基)가 추천하여 1887년 [[외무성]]에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꽃이 피었다. [[인천광역시|인천]]과 [[상하이시|상하이]]의 영사, 영국과 청나라에 주재하는 수석서기관 등을 역임하고 1899년 외무부의 통상국장이 되었다. 1900년 [[한국]]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받아 1906년까지 재임하였는데 이 무렵 [[가쓰라 다로]](桂 太郎), 고무라 주타로(小村寿太郎)와 함께 '세 남자(三人男)'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곤스케가 얼마나 비중 있는 [[외교관]]으로 부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. 주한 특명전권공사로 재임하는 동안 곤스케는 [[제1차 한일협약]]과 [[을사조약]] 체결에 앞장섰으며 1907년 [[남작]] 작위를 받아 [[화족]]이 되었다. 이후 [[청나라]], [[이탈리아]], ([[신해혁명]] 이후) [[중국]], [[영국]] 대사를 맡으며 계속 외교관으로서 삶을 살았고 1927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[[추밀원(일본)|추밀원]] 의원을 지내다가 1939년 6월 27일 향년 79세에 숨을 거두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